김해김씨 석성공파 청학문중
김해김씨 석성공파 청학문중
세 | 휘 명 | 직 위 | 직 책 | 간추린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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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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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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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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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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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는 서기 42년 금알에서 태어나셨기에 성을 김으로 하였고, 맨처음 나왔다하여 이름을 수로라하였습니다. 맨처음 조상님이시기에 김해김씨라는 성씨의 시조가 되셨습니다. 알에서 12시간만에 아이로 변했고 10여일만에 성인으로 성장하여 가락국(가야)의 왕이 되셨습니다. |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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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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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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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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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신라시대 때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면서 쇠퇴해져가는 김해김씨를 다시 일으켜 세웠기에 중시조가 되셨습니다. 사후 신라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셨습니다. |
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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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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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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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군파(경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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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경은 고려 충혜왕때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김녕군에 봉해지면서 쇠락해져 가는 김해김씨를 다시 한번 더 일으켜 세웠기에 중조가 되셨습니다. 김녕군에 봉해졌기에 김녕군파라하며 그 후손들이 서울에 많이 살았다하여 경파라고도 합니다. |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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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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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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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공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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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은 조선시대 때 석성현감(현재 부여군)을 거쳐 한성부 판관을 지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유로 석성공파의 파조가 되셨습니다. |
6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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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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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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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학문중 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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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조는 왜사기 만드는 사기막을 운영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순화궁과 청학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후손들은 그 토지를 기반으로 청학리 일대에 터전을 잡았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청학문중의 종조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
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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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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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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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문중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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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덕은 1983년 10월 1일 청학리 445번지 자택에서 김옥조의 후손들만으로 구성된 청학문중을 창립하였고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규약을 제정하였고 무덤 주인이 불분명한 선산의 묘지를 조사하여 묘도를 작성하는 등 청학문중의 기틀을 마련하 였습니다. |
먼 옛날 한강 북쪽에 단군 고조선이 건국한 이래 부여, 옥저, 동예 등의 부족국가가 생겨나고 평양을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강 남쪽으로는 마한, 진한, 변한이 성립되어 삼한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B.C. 193년 위만이 난세를 피하여 들어와서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세웠습니다. B.C. 108년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한사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한족을 몰아내기 위하여 B.C. 57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육촌장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하고 B.C. 37년에는 졸본부여를
중심으로 고주몽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B.C. 18년에는 위례성을 중심으로 고온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처음 가야 지역에는 나라도 없었고 임금과 신하도 없었습니다. 오직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이라 일컫는 9명의
간(추장)과 백성들만 있었습니다.
가야 사람들은 모두 7만 5천명이었으며 주로 산과 들에 우물을 파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서기 42년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던 북쪽 구지봉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리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이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곳에 누가 있느냐?” 대표자 구간들이 대답했습니다.“우리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냐?” “구지라는 곳입니다.”
그러자 이상한 목소리가 또 말했습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산꼭대기에서 흙을 뿌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 후 자주색 빛 한 줄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땅에 빛이 닿은 곳을 찾아가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색 상자가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해처럼 둥글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알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앞에서 수없이 절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상자를 아도간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 평상위에 놓아두었습니다.
12시간이 지난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다시 그 상자를 열자, 그 속에 있던 여섯 개의 알은 수려한 용모를 가진 여섯 명의 아이로 변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평상 위에 앉자 사람들은 다시 절을 한 뒤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십 여일이 지나자 곧 구척 장신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 달 보름 때, 이들 가운데 첫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수로(首露)라고
지었고 금합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섯 가야 중의 하나입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나머지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금관가야 | 대가야 | 아라가야 | 성산가야 | 고령가야 | 소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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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김해지방 | 현 고령지방 | 현 함안지방 | 현 성주지방 | 현 합창지방 | 현 고성지방 |
김수로 | 김고로 | 김대로 | 김아로 | 김벽로 | 김말로 |
가야는 동쪽으로 황산강, 서남쪽으로 바다, 서북쪽으로 지리산, 동북쪽으로 가야산이 위치한 곳에 있었는데, 이것은 지금의 낙동강 서쪽에 있는 경상도 지역에 해당됩니다. 수로왕은 임시로 아주 소박하고 검소한 대궐은 짓고 궁궐로 삼았습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다음 해 새로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임시 궁궐의 남쪽에 있는 신답평에 가서 사방의 산을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이 땅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경치가 빼어나고 아름답고 신비하니 가히 성인들이 살만한 곳이로구나. 이곳을 발판으로 해서 강토를 개척하여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수로왕은 천오백 걸음 정도의 길이를 가진 외성을 짓고 그 안에 궁궐, 전당, 관청의 청사, 무기고, 창고를 지울 터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 안의 젊은이와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만에 성을 쌓는 공사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농사일이 한가로운 농한기를 이용해서 궁궐과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음 해가 되어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새 도읍이 완성되자 수로왕은 좋은 날을 골라 새 궁궐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나라 일을 보면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허황옥은 본래 인도 아유타국(월지국)의 공주인데 부왕과 왕후가 꿈에 상제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습니다. 공주는 오빠 장유화상 및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 신귀간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허황후는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후 허황후의 성을 따라 허씨 성을 사용하던 두 왕자로부터 한국의 허씨 성이 유래되어 김해 허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락 기원 148년(189년) 3월 1일 왕후가 붕어하니 향년 157세였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은 그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으며 금관성 서북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능의 이름을 후능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 언덕을 능현,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대왕은 왕후가 서거하신 뒤 매양 외로움을 달래며 슬퍼하시다가 왕후가 돌아가신지 10년 후인 가락기원 158년(199년) 3월 23일에 승하하시니 향년 158세 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여윈 듯, 왕후가 서거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백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납릉이라 하였습니다
김수로왕릉은 경상북도 김해시 서상동 312번지(가락로93번길 26)에 있고 수로왕비릉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산80-1(가락로 190번길 1)에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대제일은 아드님 도왕에서부터 9대손 양왕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올렸는데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풍성하고 청결한 제물을 차려 제를 올리는 일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음력 3월 15일과 음력 9월 15일에 숭선전에서 대제를 봉행합니다. 숭선전은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312번지(가락로 93번길 26)에 있습니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김구형)로 법흥왕 19년 서기 532년에 신라에 투항해 신라의 진골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김무력으로 진흥왕 15년 서기 554년에 관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아버지는 김서현으로 진평왕 51년 서기 629년에 낭비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어머니 만명부인은 숙흘종의 딸로 지증왕의 종손입니다. 김유신의 가문은 진골이었지만 다른 토착 진골
보다는 지위가 낮았습니다. 아버지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결혼하려고 할 때 숙흘종은 딸을 감금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김유신의 여동생도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뒤의 태종무열왕)와 어려운 곡절을 겪고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부인은 김춘추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입니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화랑도)를 거느렸습니다. 17세 때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혼자 산속에 들아가 수련했는데, 이 때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629년에는 중당의 당주로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선덕여왕 11년 서기 642년에 친구인 김춘추가 백제 정벌을 위해 고구려로 군사 원조를 요청하러 갈 때, 김춘추가 위험할 경우를 대비해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에 압량주(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가 되었고, 2년 뒤에는 소판(잡찬)에 올라 백제의 7개 성을 점령했습니다. 647년에 여왕이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비담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647년에는 마지막 성골인 진덕 여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상대등 알천을 왕위 계승자로 추대했는데, 김유신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왔습니다. 태종무열왕 7년 서기 660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7월에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의 총지휘관으로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공으로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문무왕 1년 서기 661년에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이듬해에 평양까지 군량미를 제공하고 돌아왔습니다. 668년에 고구려 정벌군의 총지휘관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직접 참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정벌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하여 태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금산원(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일대)에 장사 지낸 뒤 묘비를 세우고 묘를 지키는 수호묘를 따로 책정하여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제 42대 흥덕왕때 흥무대왕에 추봉되었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무덤은 사적 제21호입니다. 송화산 중턱 구릉위의 울찬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형 봉토분입니다. 봉분에는 둘레돌과 돌난간을 둘렀고 그 사이의 바닥에 돌을 깔았습니다. 무덤의 모습이 왕릉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고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둘레돌에 새겨진 십이지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어, 군복을 입고 있는 다른 왕릉의 십이지상과는 다릅니다. 지금 있는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며, 무인석, 문인석, 석성은 최근에 보수한 것입니다.
휘 주국과 해주군부인 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고려 25대 충렬왕때 문과급제하시고 4조(충렬25대, 충선26대, 충숙27대, 충혜28대)에서 벼슬을 두루 거쳐 삼중대광 정1품 벼슬을 지냈습니다.
28대 충혜왕 3년(1342) 조적의 난을 평정하고 김녕군에 봉해졌습니다. 충혜왕이 무도함에 정단문학 이조년과 수차 충언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세울 것을 바랐으나 끝내 듣지 않으므로 보령현 속리산
골짜기에 은둔하여 3생(소, 양, 돼지)을 피하고 사슴을 벗하고 맑은 물과 안개를 머금으며 삶을 마치셨습니다. 묘는 속리산 줄기 화산 견훤산성내의 성치골 건좌에 있으며 즉 지금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이며 생졸년도는 미상입니다. 묘는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66년 윤 3월 3일에 후손 찬옥이 현혹의 여러 종인을 안내하여 “삼중대광 김녕군 목경지묘 화산 건좌”라는 지석을 발견하고 많은
고증을 거쳐 중조의 묘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많은 종인이 기금을 마련하여 1983년 화산재를 건립하고 1985년 신도비, 묘비를 묘소 입구에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화산재에서 제향합니다.
배는 안동군부인 권씨이며 길창군의 따님이십니다. 김녕군에 봉해졌기에 김녕군파라고 하며 자손들이 경기도 및 서울 일원에 많이 살기 때문에 경파라고도 합니다.
자는 희지(熙之), 호는 지족당(知足堂)입니다. 성종3년 1472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성종5년 1474년 서사순릉 조선9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릉재 파주참봉을 지내셨습니다. 성종 6년 1474년
내간상으로 사직하였습니다. 탈상 후 다시 관직에 나가시어 성종, 연산에 걸쳐 벼슬을 하였는데 석성현감(지금의 부여군)을 거쳐 한성판관에 이르렀습니다. 석성현감 재임 중 선정으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연산10년 1504년 의금부 경력, 1506년 어모장군오위호군으로 승차하였습니다. 중종2년 1507년 폐철사찰을 부활한다는 논란이 생겨 성균관 유생들의 앞장을 서서 창기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부인은 안동권씨 휘원의 딸입니다. 돌아가신 날은 미상이고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매현리 사동 선영 우강제2위 손좌입니다.
김옥조는 석성공파 휘 영순의 9세손입니다.
김옥조와 형님이신 김원조 두형제 분께서는 한양에 사셨습니다. 이 시기에 안동김씨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삼족을 멸할까봐 안동김씨에서 김해김씨로 변경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김해김씨인 두 형제분께서는 한양에서 덕능으로 낙향하시게 되었습니다. 덕능 창령조씨댁 데릴사위로 사시면서 순화궁 부근 수레골에서 왜사기를 구어 가사를 이끌어 가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곳을 사기막이라 칭하시고 계속 운영이 잘 되어 순화궁 및 동학골(청학리)에 논과 밭을 많이 매입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손들이 영특하지 못하여 세부측량시 많은 전답을 빼앗겼고 다소 남은 전답도 거의 다
소비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가승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가승이란 직계조상을 중심으로 하여
밝힌 가계 기록인데 이마저도 자손들이 불태웠기에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김옥조의 후손들은 청학문중을 창립하고 김옥조를 종조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종조 김옥조가 사기막을 운영하면서 매입한 토지가 기반이 되어 그의 후손들은 청학리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이 영특하지 못하여 많은 토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할 때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1983년 10월 1일 김옥조 후손들로만으로 구성된 김해김씨 석성공파 청학문중을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김귀덕을 선임하였습니다. 규약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상의 묘를 파악하여 “청학리 김해김씨 묘도”를 최초로 작성 후 배포하는 등 청학문중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